2박3일 안동, 대구교구 일대 거룩한 신앙 선조 발자취를 따라서 2코스(모텔급)
안동교구와 대구교구 전체를 2박3일 동안
상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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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간
23일
운행편
전용차량
2022년01월01일
2022년01월31일
호텔
관광호텔
여행도시
서울/안동/김천/대구
최소출발인원
15
담당자
이기왕
포함사항 및 불포함사항
포함사항 | ►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식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
불포함사항 | ►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여정 변경 요청시 이에 따르는 추가 비용이 발생됩니다. |
1 DAY | |||
서울,경기 출발 ►봉화 우곡성지 한국교회 최초 수덕자 홍유한 선생과 후손 순교자들의 안식처
경상북도 봉화군 문수산 중턱의 우곡리 골짜기 안에는 한국 교회 창립 이전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스스로 그 가르침을 고요한 가운데 실천한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신동이라는 평판을 얻었던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1750년경부터 이익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함께 “천주실의”와 “칠극” 등 서학을 연구하면서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함이 천주학의 가르침 안에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했습니다.
홍유한은 깨달은 바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1757년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여 18년간 “칠극”에 따른 천주교의 수계생활에 정진했습니다. 1775년 그는 더 깊은 믿음을 위해 경상북도 소백산 밑의 단산면 구구리로 들어갔습니다. 축일표도 기도서도 없었지만 매월 7일째 되는 날을 주일로 정해 세속의 모든 일을 접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으며,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는 정확한 날을 모르는 대신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습니다.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낸 그는 1785년 세상을 떠나 우곡리에 안장되었습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은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학문 연구를 통해 얻은 진리를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한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뜻을 이어받아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후손들이 13명이나 됩니다.
이에 후손들은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했으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다가 안동교구와 협의하여 선조인 홍유한 선생의 묘가 있는 우곡 성지에 13위 순교자들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2009년 5월 안동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13위 순교자들의 순교 터에서 흙을 담아와 가묘를 조성하고 ‘홍유한 후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이로써 우곡리의 골짜기는 홍유한 선생과 그 후손 순교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후배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주는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영주 홍유한 고택지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1784년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수덕생활을 한 선각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농은 홍유한입니다.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그가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은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힙니다.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천주학을 처음 접한 뒤 유교와 불교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리를 발견한 그는 이곳 구구리에서 1775년부터 10년간 학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서학을 연구하던 중 진리를 발견한 홍유한은 1757년 서울을 떠나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18년간 홀로 신앙을 연마했습니다. 그러던 중 1775년 더욱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 아래 있는 순흥 고을 구고리(현 구구리)로 옮겨 가서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냈습니다. 선종 후 그의 시신은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습니다.
홍유한의 유택지에는 경종 4년(1724년) 그의 조부인 홍중명이 하사받은 효자문 현판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안동교구는 홍유한 선생의 신앙을 기리기 위해 1995년 5월 27일 교구 설정 25주년과 홍유한 선생 선종 210주년을 맞아 효자문 안마당에 유적비를 건립했습니다. 유적비 앞면에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풍산 홍공 유한 선생 유적지’라 기록하고, 옆과 뒷면에는 그의 생애를 상술했습니다.
중식 ►문경 여우목성지 성 이윤일과 서치보 가정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 여우목은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예로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충청도 홍주 출신의 이윤일 가정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도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 서인순 시몬,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습니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고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다시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여우목 성지를 관리하는 문경 성당은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교우촌 터 부근에 1255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1999년 9월 서치보와 서인순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 4월 대형 십자가, 11월 제대 · 성모상 ·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꾸준히 조경 작업을 실시하여 2002년 9월 성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문경 진안리성지 소백산맥의 문경 지방과 충청도의 경계지역에 있는 조령(일명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였습니다. 그래서 숙종 34년에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했습니다. 이곳이 영남의 관문이기에 서울로 과거나 일을 보러가는 이들은 물론, 최양업 신부와 칼레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전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1836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1849년 4월 15일 상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5개 도(道)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은 그의 활동은 12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울주군의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했으나 무사히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 방문을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선종 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교우촌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초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습니다.
►마원성지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우정을 기리며 영남의 관문인 새재 아래 위치한 문경시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인근 교우촌처럼 화전을 일구며 살던 유서 깊은 교우촌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새재를 넘어 마원까지 미쳤고, 이때 마을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습니다.
현재 마원에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남아 있습니다. 칼래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좁쌀을 사기 위해 한실 교우촌에 갔다가 그곳에 숨어 있던 칼래 신부를 더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에게 발각되어 3일 만에 새벽을 틈타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 했는데,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자 칼래 신부는 박 마티아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했습니다. 칼래 신부의 명에 순명하여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박 마티아는 그 해 12월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고, 옥에 갇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문경 인근에서 잡혀온 교우들을 권면하며 순교의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1867년 1월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 고향에 안장했습니다.
박상근 마티아의 묘는 1983년 초 처음 발견되어, 1985년 9월 현재의 위치에 조성한 새 무덤으로 이장했습니다. 1995년 초 문경지구 사목협의회는 성지 개발을 위해 주차장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로를 새로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경상북도의 사도인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 마티아의 장한 믿음과 숭고한 우정을 상징하는 동상과 부활하신 예수상, 십자가의 길, 성모상 등을 세우고 1996년 10월 3일 동상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상주옥터 박해 시기도 많은 신앙 선조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고된 옥살이를 겪었다. 옥에 갇힌 교우들이 너무 많아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고, 상처에서 흐른 피와 고름으로 악취가 나고 염병이 돌아 그 자리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교우들은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상처가 곪아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나거나, 굶어 죽고 추위 속에 얼어 죽었다. 그중 신앙을 굽히지 않는 교우에게는 관장이 직접 교수형(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을 내려 포졸들이 옥중에서 그들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복자 박상근(마티아, 1837~1867)도 어떤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다 결국 교수형을 받고 경북 상주 옥에서 순교했다. 충직한 신앙으로 고통과 유혹을 이겨낸 복자를 본받고자 그의 마지막 숨이 머물렀던 상주 옥터를 찾기로 했다.
상주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상주 읍성’ 남문 밖에 감옥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상주 옥의 순교자는 복자 박상근(마티아, 1837~1867)을 비롯해 그의 숙모 홍 마리아ㆍ친척 박 막달레나 등 20명. 전문가들은 더 많은 교우가 이곳에 갇혀 고통 속에 신앙을 지켜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주 성은 물론 상주 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 도시화 정책에 따라 일본인들은 상업 활동하기 편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상주 성을 헐었고 상주 옥이 있던 자리에는 우시장을 만들었습니다.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시장이었던 상주 옥터는 과일과 채소를 파는 곳이 되었습니다. 상주역에서 근처 남문시장에 있는 ‘상주 남문 청과’ 자리가 바로 상주 옥터 자리이며 청과 건물과 골목을 하나 두고 떨어진 곳에 상주 옥터 성지가 있습니다. ►상주 천주교 신앙 고백비 돌에 새겨진 신앙고백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 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고백비’가 서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복운의 아들 4형제가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차남인 김삼록 도미니코는 병인박해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난 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를 단단한 바위 위에 직접 새겼습니다.
이 신앙고백비가 교회의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1980년대의 일입니다. 김삼록은 신앙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여러 나무를 심어 눈에 잘 띄지 않게 했습니다. 1945년 해방 후 그의 손자인 김순경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신앙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습니다. 1982년 당시 서문동 본당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졌고, 1984년 서울대교구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졌습니다. 1980년대 안동교구와 남성동 성당을 중심으로 교회 사적지 개발을 위해 신앙고백비 주변 부지 매입이 시작되었고, 1999년 당시 옥산 성당 신기룡 신부와 회장단 그리고 청리 공소회장의 봉헌으로 성역화를 추진하여 대형 십자가와 제대, 십자가의 길, 2000년 대희년 상징 조형물 등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상주 신앙고백비는 2009년 12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석식 호텔 숙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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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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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
아침 : 점심 : 저녁 : |
2 DAY | |||
조식 ►김천 황금성당 이곳에 처음 성당이 들어선 것은 1901년.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소백산맥을 넘어온 충청·전라·경상도 신자들이 김천 깊은 산중에 정착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린 지 35년만입니다. 당시 김천 지역은 1894년 설립된 가실본당(현 낙산본당, 경북 칠곡군 소재) 관할이었지만 미래 발전 가능성을 예감한 주임 김성학 신부(1870~1938)가 김천에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조선교구장 뮈텔 대주교에게 건의함에 따라 가실본당에서 분리 신설되었습니다.
김 신부가 초가 한 채를 구입, 세운 첫 성당은 지금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07년 그 자리에 기와집을 지어 성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김천본당은 상주, 문경, 예천, 성주, 황간 등 경북 북부지역 복음화에 매진, 1911년에는 신자수 25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에 본당은 1934년 협소한 기와 성당을 허물고 바로 옆에 붉은 벽돌조 고딕식 성당을 신축했고, 1958년 김천 평화동본당을 분가하면서 행정구역 명칭을 따라 김천 황금동본당으로 바꿨습니다. 이후 지례·지좌본당을 분리 신설하는 등 김천지역 복음화 산실이 됐고, 대희년과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2000년에 구성당은 그대로 보전한 채 옛 기와 성당 터 바로 옆에 100주년 기념성전을 세웠습니다. 성당 마당 왼편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천 지방 순교자 유 시몬과 무명 동료 순교자 네 명의 거룩한 삶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본당이 100주년을 맞아 세운 순교자 현양비가 있습니다.
►군위군 김수환 추기경 사랑나눔 공원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사랑과 나눔 공원’이 경북 군위군 군위읍에 조성됐다. 군위읍 용대리 3만 2128㎡터에 꾸며진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에는 김 추기경 생가와 옹기가마, 스테파노 경당, 십자가의 길, 추모전시관, 추모공원, 평화의 숲, 잔디광장이 들어서 있다. 공원에서 약 500m 떨어진 옛 군위초등학교 용대분교 자리에 청소년수련원을 새롭게 꾸몄다.
김 추기경의 생가는 대구대교구가 매입해 2005년부터 관리해오다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1920~1930년대 초가로 복원했다. 생가 앞에 재현해 놓은 옹기가마는 옹기장이의 아들로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사제 성소를 키웠던 김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추모기념관은 김 추기경의 생애 전반을 볼 수 있는 각종 사진과 동영상 자료, 기록물,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김 추기경의 체온이 배어 있는 제의와 미사 도구, 십자가, 필기구 등은 이 시대 사랑의 사도로 살아온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념관 천장은 김 추기경의 아호인 ‘옹기’를 주제로 십자가 모양의 조명을 설치해 놓았다.
추모기념관 옆에는 김 추기경의 생애를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하고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스테파노 경당이 마련돼 있다. 추모정원은 김 추기경의 사진과 말씀을 타일로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고, 평화의 숲에는 김 추기경의 나이와 같은 86개 계단이 십자가 모양으로 조성돼 있으며 계단 끝에는 예수상이 서 있다. 용대분교에 새로 꾸민 청소년수련원은 100여 명을 동시에 수용 가능한 숙박시설과 강당, 운동장, 미니야영장, 나무놀이터, 수련의 숲, 암벽등반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중식 ►대구 한티순교지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심심산골에 있는 한티는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몸을 숨긴 곳이자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순교성지입니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인근 신나무골과 비슷한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산 것으로 추정됩니다. 1860년 경신박해로 큰 아픔을 겪었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 안에서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넘긴 한티 마을은 1866년 시작하여 3년 가까이 이어진 병인박해의 여파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됩니다. 1868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박해 소식을 들은 인근 교우들이 왔을 때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했고,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의 묘는 모두 37기로 그중에서 조 가롤로 가족 등 4기만 신원이 알려져 있습니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조영학 토마스(조 가롤로의 아들)와 몇몇 교우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이어가기 위해 공소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재건된 공소는 1900년 초 신자 수 80여 명 이상의 전성기를 거쳐 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기까지 공소의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순교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과 조사를 시작한 대구대교구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확인하고, 1991년 피정의 집, 1995년 성지 관리 사무소, 1998년 옛 공소 복원, 2000년 대구 대신학교 영성관, 2004년 순례자 성당 축복식, 2016년 한티 가는 길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현재 국내외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 성지에서 많은 영적인 힘을 받아 가고 있습니다. 또한 박해시대 한티의 교우들이 신나무골을 오가며 걸었던 한티가는 길을 찾는 도보순례자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칠곡 신나무골 성지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신나무골은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면서도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가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고, 샤스탕 · 다블뤼 · 최양업 · 리델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박해가 잦아들면서 다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영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순회 전교를 시작했습니다. 1885년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짓고 정착한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대구 본당을 설립하고 곧이어 대구 읍성 전교에 나섰고, 1898년 계산동에 십자형 한옥 성당을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그 자리에 현 계산동 주교좌성당의 원형이 되는 라틴 십자형의 고딕 성당을 지어 1903년 축성식을 올렸습니다.
대구 교회 첫 본당 터인 신나무골 성지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성지 입구로 이장했습니다. 이선이 엘리사벳과 그의 남편 배정모 그리고 세 아이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칠곡을 떠나 잠시 신나무골로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한티로 다시 숨어들었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남편 배정모는 배교했지만 이선이 엘리사벳과 장남 스테파노(배도령)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그 자리에서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배교하고 풀려났던 남편은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아들의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다가, 다시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신만 이장했습니다.
1977년 제1차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지를 관할하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를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에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등을 2차로 복원했습니다. 2015년 대구대교구로 성지 관리가 이관된 후 기존에 복원했던 건물을 철거하고 3차 성지 개발에 들어가 2019년 5월 새 한옥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새 성당은 로베르 신부가 현 계산 주교좌성당 자리에 지었던 첫 한옥 성당을 재현한 것입니다. 이로써 화재로 소실된 대구대교구의 첫 성당을, 대구의 첫 본당이 시작된 터에 다시 세웠습니다.
►칠곡 가실성당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1894년 신나무골에서 경상도 북부 지방 선교를 담당하던 파이야스 신부는 가실(佳室)로 이주하여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가실 성당을 설립했습니다. 1912년 부임한 투르뇌 신부는 1944년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가실 본당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제 강점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또한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1925년 9월 드망즈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사절 지아르디니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했습니다.
투르뇌 신부는 1922-1924년 사이에 현재의 신 로마네스크식 벽돌조 성당을 건립했는데, 설계는 명동 성당과 대구 계산 성당을 지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와넬 신부가 담당했습니다. 프와넬 신부는 중국 기술자들에게 벽돌을 한 장씩 굽도록 하여 잘 구워진 것은 성당을 짓는데, 중간치는 사제관을 짓는데, 품질이 나쁜 것은 버렸다고 합니다. 당시의 유물과 유산은 현재 유물관(구 사제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도시화와 탈농촌 현상으로 신자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1990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성모동굴과 교육관을 마련하여 1995년 100주년을 맞아 봉헌했습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동양화가 손석희가 그린 십자가의 길 14처와 독일의 유명한 색유리 작가 에기노 바이너트가 제작한 유리화를 2002년에 설치했습니다. 10개의 창문에 설치된 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대구대교구에서 현 계산 주교좌성당에 이은 두 번째이자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인 가실 성당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근대 건축사와 교회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옛 사제관과 함께 2003년 4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구대교구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낙산 본당으로 변경된 본당명을 2005년 2월 본래의 가실 본당으로 다시 변경했습니다. 2011년 7월에는 16년이나 늦었지만 충분한 자료를 토대로 “가실(낙산) 성당 100년사”를 출판했습니다.
►대구 새방골 성당 ►경상감영 옥터 석식,호텔 숙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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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AY | |||
조식 ►대구복자성당 대구 도심에 위치한 복자 성당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3위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입니다. 울산 장대에서 한날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이들의 시신은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에 의해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강둑 아래 가매장되었다가 1907년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 합장되었습니다. 그 후 1932년 월배동 감천리의 교회 묘지로 옮겨졌다가 1973년 복자 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산내면 단석산의 범굴에 피신하던 이들은 1868년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 진영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곤장으로 피와 살이 터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경주 진영에서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까지 80리 길을 걸어 도착한 울산 장대에서 그들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복자 성당은 대구대교구가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기념해 교구민의 성금으로 1970년 설립한 성당으로 1973년 3위 순교자의 유해를 이장하면서부터 도심의 순례지로서 순교신심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2002년 순교자 묘역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묘소를 새로 단장하고 묘역 둘레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으며, 묘소 앞에는 넓은 잔디마당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성당 내부 제대와 감실에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여러 성인들의 유해를 안치했습니다. 2010년에는 노후화된 성당을 보수해 3위 순교자를 기리는 성당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한 후 감사미사를 봉헌했습니다. 3위 순교자는 모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주교좌 범어구대구성당 ►대교구청 성모당 대구대교구청 내에 위치한 성모당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순례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열린 성지, 치유의 성지입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 · 설치되면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교구에 꼭 필요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을 이뤄주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여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허원을 드렸습니다.
1913년과 1914년에 주교관과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건립했고, 주교좌성당 증축이 늦어지던 중 당시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 신부가 중병을 앓아 선종 직전에 이르자 드망즈 주교는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습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 마침내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해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킵니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입니다.
성모당은 신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거룩한 땅일 뿐 아니라 각종 가톨릭 신심행사와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사적지로 외교인들도 큰 호기심을 갖고 있는 대구의 명소입니다. 1990년 12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보수공사를 하여 새로 단장했습니다. 2009년에는 로마의 성모 대성전과 영적인 유대를 맺은 성모 성지로 지정되었습니다. 2018년 10월에는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행사와 기념미사를 거행했습니다.
►대교구청 성직자묘 ►성유스티노신학교 1911년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 · 신학교 · 주교좌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루르드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지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고, 그 결과 1912년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아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명명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여 1918년 첫 출신 사제를 배출했습니다. 사제양성 교육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신학교는 일제에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었습니다.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 부대에 징발되었습니다. 1982년 사제 양성을 위해 47년 만에 선목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한 후 1985년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고, 1994년에는 효성여자대학교와 통합하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대구관구 대신학원)이 되었습니다.
옛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중앙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었으며, 1층 전면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사용되던 연속 아치가 있어서 툇간 역할을 했습니다. 1946년 당시 폐교 상태에 있던 신학교는 대건초급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대건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1991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이전해 오면서 전면으로 돌출되었던 양 날개가 철거되고 성당을 포함한 중앙 일부만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신학교 건물은 1990년 12월 15일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4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기존 건물을 재정비해 ‘성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중식 ►관덕정 순교기념관 대구 관덕정(觀德亭)은 조선 시대 무과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영조 25년에 세워졌습니다. 관덕정 앞마당에 자리한 연병장에서는 무과를 위한 활쏘기와 말타기, 세시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도 행해졌습니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연관을 맺은 것은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처형장에서 천주교인들이 순교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천주교인들은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선조 34년에 경상도 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경상도 전역의 교우들이 대구로 이송되어 감영에서 옥사하거나 처형장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렇게 관덕정과 감영 등 대구 지역에서 순교한 20위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관덕정이 순교성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순교자 이윤일 요한이 시성되면서부터입니다. 대구대교구는 사형터로 고증된 부지를 확보하여 1985년 순교기념관 기공식을 시작으로 1991년 1월 20일 지하경당 축복식과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갖고 그해 5월 31일 개관하였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당시 관덕정 모습을 재현한 순교 기념관에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와 함께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 그리고 영남 지역 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덕정 순교 기념관은 순교정신을 함양하고 신자들의 신앙 재교육과 선교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2년부터 매년 ‘성 이윤일 요한제’를 기획 · 거행하고 있습니다. 2002년 1월 21일에는 기념관 입구에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의 동상을 세웠고, 2007년 1월 21일 기념관 바로 옆에 신관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회의실과 강당 등을 갖춘 신관은 순교신앙 학습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개관 25주년을 맞아 2014년 시복된 124위 중 이곳에서 순교한 11위 ‘순교 복자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했습니다.
►주교좌 계산성당 계산 성당은 1886년 블랑 주교에 의해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11년 대구대목구의 신설과 함께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는 박해의 여파로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 박해 이후 죽밭골로 옮겼고, 1891년 대구 교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으로 대구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해 다시 대구로 돌아온 로베르 신부는 대어벌에 임시 성당을 구했고, 이어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했습니다.
1899년 전통 한식의 목조 성당을 완공해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축성식을 거행했으나 1901년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재차 성당 건립을 시작해 1902년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식 벽돌조 성당을 준공했습니다. 두 번의 성당 내부 공사에 이어 1918년 기존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당의 동남북 3면을 증축해 1919년 5월 재차 축성식을 갔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계산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어 1991년 성당 건립 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고,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1986년 성당 마당 한 편에 자그마한 공원을 조성하고 계산 성당을 지은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2006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맞아 문화관 2층에 유물 전시관을 마련하였고, 2009년에는 대구시에서 추진 중인 근대문화거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성당 외벽 조명을 설치하고 성당 마당을 공원으로 조성해 열린 공간으로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출발지 도착,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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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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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
아침 : 점심 : 저녁 : |
►노쇼핑 노옵션 노팁 진행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맛있는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20명 이상 출발 기준 전용차량으로 진행되며 성지순례 전문 해설가이드가 편안하게 모십니다.
►20명 이상인 경우 단독 미사 및 신부님 동행이 가능합니다.
►소수인원 단독 운영 신청시 별도 견적을 드리며 미사는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출발지는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각 위치를 고려하여 서울 경기 권역 내에서 적절한 위치로 확정 합니다.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엉클죠의 바티칸산책] (41)무릎 기도로 닳은 대리석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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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칼라 산타 28계단의 실물. 예수님이 빌라도의 신문을 받기 위해 무릎으로 올라가야 했던 계단의 원형이 지난해 순례자들에게 개방되었다.
돌 위에서의 무릎 기도! 뼈와 돌이 부딪힙니다. 무릎으로 28개 돌계단을 오릅니다. 무릎 종지뼈와 정강이뼈가 곧 빠개질 것만 같습니다. 계단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사도신경….
무릎 기도로 닳은 대리석이 갓난아이의 피부처럼 뽀얗고 촉감이 부드럽습니다. 세상에 이런 돌이 있을까 싶습니다.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은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철망으로 씌워진 네 곳의 핏자국, 바로 옆 대리석이 주발처럼 움푹 패어 있더군요. 특별한 기도의 흔적 같습니다.
성스러운 계단
‘스칼라 산타’(Scala Santa),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의 신문을 받기 위해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던 ‘성스러운 계단’입니다. 교황청은 지난해 부활절에 순례자들에게 스칼라 산타 실물을 60일간 특별 개방했습니다. 스칼라 산타는 예수님 수난 후 약 300년 동안 예루살렘 땅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헬레나 성녀가 발굴하여 326년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헬레나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반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입니다.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10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순례자가 스칼라 산타에서 무릎 기도를 드렸을까? 대리석 계단이 닳고 닳아 원형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인노첸시오 13세 교황이 1723년 특별 보호 조치를 취했습니다. 돌처럼 견고한 호두나무로 덮개를 만들어 스칼라 산타의 계단을 씌운 것입니다. 호두나무 덮개인들 닳지 않겠습니까.
교황청이 지난해 낡은 호두나무 덮개를 교체했습니다. 스칼라 산타가 296년 만에 베일을 벗은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로마 한인성당의 신자들도 지난해 봄 사순 시기에 스칼라 산타 순례에 나섰습니다. 한인신학원 원장과 한인성당 주임을 맡고 있는 정의철 신부님이 인솔하고, 손현숙 선생님이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성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글로 쓰면 구별이 안 되지만, 한자로 쓰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하나는 聖地이고 다른 하나는 聖址입니다. 聖地는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땅, 발자취와 숨결이 남아 있는 땅입니다. 聖址는 성모님 발현지나 성인 순교자 등과 관련된 유적지입니다. 한국에서는 聖地와 聖址가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어로 聖地는 테라 산타(Terra Santa, 영어 Holy Land)이고, 聖址는 상투아리오(Santuario, 영어 Shrine 또는 Sanctuary)입니다. 테라 산타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의 나라 이탈리아의 성지도 모두 상투아리오입니다. 예외적으로 로마에 테라 산타가 한곳 있습니다. 바로 스칼라 산타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실상 Terra Santa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로마에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스칼라 산타뿐입니다.
헬레나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오로지 사랑으로 아들을 키웠고, 아들은 어머니를 한시도 잊지 않은 효자였습니다. 아들은 306년 황제(서방 정제)에 즉위하자마자 어머니를 독일 트리어의 궁전으로 모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아들의 종교 정책에 조언을 많이 했습니다. 밀라노 칙령, 성전 건설, 그리스도교 신자 지원…. 헬레나는 아들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부터 강한 신앙심을 갖고 있던 신자였습니다. 많은 박해를 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년) 시절 이미 황실에 적지 않은 수의 신자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측근 근위병이었던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의 순교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헬레나의 신앙 덕분에
헬레나는 325년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고 아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팔레스티나에 ‘주님 탄생 기념 성당’, ‘주님 무덤 성당’ 등 여러 성당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 몸에 박혔던 못, 가시관의 가시, 죄목을 적었던 죄명패, 우도의 십자가 횡목 등 예수님 관련 유품을 발굴하여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로마에 있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에 이 유품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스칼라 산타도 이때 함께 가져왔습니다.
어머니가 가져온 스칼라 산타가 로마에 있기에, 아들이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다고 믿은 바티칸 언덕에 지은 베드로 대성당이 더 거룩해 보입니다. 초세기의 유명한 역사가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열두 사도처럼 헬레나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가 뛰어났다.”
[엉클죠의 바티칸산책] (41)무릎 기도로 닳은 대리석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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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칼라 산타 28계단의 실물. 예수님이 빌라도의 신문을 받기 위해 무릎으로 올라가야 했던 계단의 원형이 지난해 순례자들에게 개방되었다.
돌 위에서의 무릎 기도! 뼈와 돌이 부딪힙니다. 무릎으로 28개 돌계단을 오릅니다. 무릎 종지뼈와 정강이뼈가 곧 빠개질 것만 같습니다. 계단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사도신경….
무릎 기도로 닳은 대리석이 갓난아이의 피부처럼 뽀얗고 촉감이 부드럽습니다. 세상에 이런 돌이 있을까 싶습니다.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은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철망으로 씌워진 네 곳의 핏자국, 바로 옆 대리석이 주발처럼 움푹 패어 있더군요. 특별한 기도의 흔적 같습니다.
성스러운 계단
‘스칼라 산타’(Scala Santa),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의 신문을 받기 위해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던 ‘성스러운 계단’입니다. 교황청은 지난해 부활절에 순례자들에게 스칼라 산타 실물을 60일간 특별 개방했습니다. 스칼라 산타는 예수님 수난 후 약 300년 동안 예루살렘 땅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헬레나 성녀가 발굴하여 326년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헬레나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반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입니다.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10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순례자가 스칼라 산타에서 무릎 기도를 드렸을까? 대리석 계단이 닳고 닳아 원형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인노첸시오 13세 교황이 1723년 특별 보호 조치를 취했습니다. 돌처럼 견고한 호두나무로 덮개를 만들어 스칼라 산타의 계단을 씌운 것입니다. 호두나무 덮개인들 닳지 않겠습니까.
교황청이 지난해 낡은 호두나무 덮개를 교체했습니다. 스칼라 산타가 296년 만에 베일을 벗은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로마 한인성당의 신자들도 지난해 봄 사순 시기에 스칼라 산타 순례에 나섰습니다. 한인신학원 원장과 한인성당 주임을 맡고 있는 정의철 신부님이 인솔하고, 손현숙 선생님이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성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글로 쓰면 구별이 안 되지만, 한자로 쓰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하나는 聖地이고 다른 하나는 聖址입니다. 聖地는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땅, 발자취와 숨결이 남아 있는 땅입니다. 聖址는 성모님 발현지나 성인 순교자 등과 관련된 유적지입니다. 한국에서는 聖地와 聖址가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어로 聖地는 테라 산타(Terra Santa, 영어 Holy Land)이고, 聖址는 상투아리오(Santuario, 영어 Shrine 또는 Sanctuary)입니다. 테라 산타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의 나라 이탈리아의 성지도 모두 상투아리오입니다. 예외적으로 로마에 테라 산타가 한곳 있습니다. 바로 스칼라 산타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실상 Terra Santa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로마에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스칼라 산타뿐입니다.
헬레나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오로지 사랑으로 아들을 키웠고, 아들은 어머니를 한시도 잊지 않은 효자였습니다. 아들은 306년 황제(서방 정제)에 즉위하자마자 어머니를 독일 트리어의 궁전으로 모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아들의 종교 정책에 조언을 많이 했습니다. 밀라노 칙령, 성전 건설, 그리스도교 신자 지원…. 헬레나는 아들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부터 강한 신앙심을 갖고 있던 신자였습니다. 많은 박해를 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년) 시절 이미 황실에 적지 않은 수의 신자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측근 근위병이었던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의 순교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헬레나의 신앙 덕분에
헬레나는 325년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고 아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팔레스티나에 ‘주님 탄생 기념 성당’, ‘주님 무덤 성당’ 등 여러 성당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 몸에 박혔던 못, 가시관의 가시, 죄목을 적었던 죄명패, 우도의 십자가 횡목 등 예수님 관련 유품을 발굴하여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로마에 있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에 이 유품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스칼라 산타도 이때 함께 가져왔습니다.
어머니가 가져온 스칼라 산타가 로마에 있기에, 아들이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다고 믿은 바티칸 언덕에 지은 베드로 대성당이 더 거룩해 보입니다. 초세기의 유명한 역사가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열두 사도처럼 헬레나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가 뛰어났다.”
►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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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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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쇼핑 노옵션
※ 문의 비안네 성지순례 (주)점프투어리즘 여행사
◆ 현 일정은 기후 변화나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동될 수 있습니다.
여행전체크사항
에약시유의사항 | 예약일 기준 3일 이내에 1인당 100,000원을 납입하셔야합니다. 위 계약금은 호텔, 교통(항공,선박,열차,현지차량), 현지 사정 등에 의하여 변경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고객님의 결제시한은 당겨질 수 있습니다. 단, 아래 명시되어 있는 취소료 규정 적용기간에 예약하신 고객님께서는 계약금보다 취소 수수료가 높을 시 취소 수수료 금액을 계약금으로 납부하셔야 합니다.. ※ 해당 여행은 여행일정 동행하는 인솔자/가이드가 없습니다. 현지 안내원/진행요원/현지 차량 기사님이 간단한 안내도와드립니다. *독도 선택관광은 울릉도 상품 예약시 미리 예약하셔야만 출발 가능합니다. ※ 모든 날짜 1인 예약은 불가합니다 (최소 2인부터 예약 가능) ※ 호텔객실 실시간 마감으로, 싱글차지 요금은 담당자 문의 바랍니다. ※ 아동요금은 객실 요금이 포함되지 않는 금액입니다. ☞ 성인1, 아동1 예약시 성인 2인요금에 싱글차지비 추가부과됩니다. * 선택관광/기항지관광/현지투어에 관한 상세 내역은 패키지 상품상세를 참고바랍니다. |
설명회 | ◈ 출발 1일전 여행대표자에게 개별 안내드립니다.(선박출항시간, 미팅 안내자 비상연락처 등 안내) ◈ 기타 알림 내용 * 후포항 도착 후 천재지변으로 결항되면 실비 공제 후 환불 됩니다. (결항 관련안내 참고) * 여행준비물: 개인위생/세면도구,드라이기,여벌의 옷,편안한 신발,우산,비상약(평소 복용하시는 약) 등 - 여행일동안 사용할 개인 ★마스크★지참 필수! -★신분증★ 필히 지참 (아동,청소년은 주민등록 등본 또는 여권 ) -예약시 여행자 모두의 정확한 명단 (성함 / 법정 생년월일 / 연락처 ) 기입 필수입니다. -신분증 미소지, 명단오류 등으로 선박탑승이 거절될 경우 여행사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울릉도에 가져오신 개인짐이나, 현지구매 물품등은 반드시 개인보관바랍니다. ☞ 울릉도 내 짐보관 또는 버스짐칸에 보관시 다른일행의 짐과 헷갈릴 수 있으니 리본,이름표 등 개인짐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을 해주시는것이 좋습니다. |
여행준비물 | 신분증(성인:신분증/학생:학생증/소인:의료보험증(원본) 또는 등본 또는 여권/외국인:여권) 신분증 미참시 승선이 불가합니다. 세면도구(치약, 칫솔, 면도기등)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 미착용시 승선이 불가합니다. |
제2조 (여행업자와 여행자 의무)
1. 여행사는 여행자에게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여행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여행알선 및 안내․운송․숙박 등 여행계획의 수립 및 실행과정에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야 합니다.
2. 여행자는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위하여 여행자간 화합도모 및 여행사의 여행질서 유지에 적극 협조하여야 합니다.
제3조 (여행의 종류 및 정의)
여행의 종류와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희망여행 : 여행자가 희망하는 여행조건에 따라 여행업자가 실시하는 여행.
2. 일반모집여행 : 여행업자가 수립한 여행조건에 따라 여행자를 모집하여 실시하는 여행.
3. 위탁모집여행 : 여행업자가 만든 모집여행상품의 여행자 모집을 타 여행업체에 위탁하여 실시하는 여행.
제4조 (계약의 구성)
1. 여행계약은 여행계약서(붙임)와 여행약관·여행일정표(또는 여행 설명서)를 계약내용으로 합니다.
2. 여행일정표(또는 여행설명서)에는 여행일자별 여행지와 관광내용·교통수단·쇼핑횟수·숙박장소·식사 등 여행실시일정 및 여행사 제공 서비스 내용과 여행자 유의사항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제5조 (특약)
여행업자와 여행자는 관계법규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서면으로 특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표준약관과 다름을 여행업자는 여행자에게 설명하여야 합니다.
제6조 (계약서 및 약관 등 교부)
여행업자는 여행자와 여행계약을 체결한 경우 계약서와 여행약관, 여행일정표(또는 여행설명서)를 각 1부씩 여행자에게 교부하여야 합니다.
제7조 (계약서 및 약관 등 교부 간주)
다음 각 호의 경우에는 여행업자가 여행자에게 여행계약서와 여행약관 및 여행일정표(또는 여행설명서)가 교부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1.여행자가 인터넷 등 전자정보망으로 제공된 여행계약서, 약관 및 여행일정표(또는 여행설명서)의 내용에 동의하고 여행계약의 체결을 신청한데 대해 여행업자가 전자정보망 내지 기계적 장치 등을 이용하여 여행자에게 승낙의 의사를 통지한 경우
2. 여행업자가 팩시밀리 등 기계적 장치를 이용하여 제공한 여행계약서, 약관 및 여행일정표(또는 여행설명서)의 내용에 대하여 여행자가 동의하고 여행계약의 체결을 신청하는 서면을 송부 한데 대해 여행업자가 전자정보망 내지 기계적 장치 등을 이용하여 여행자에게 승낙의 의사를 통지한 경우
제8조 (여행업자의 책임)
1. 여행업자는 여행 출발시부터 도착시까지 여행업자 본인 또는 그 고용인, 현지여행업자 또는 그 고용인 등(이하 '사용인'이라 함)이 제2조제1항에서 규정한 여행업자 임무와 관련하여 여행자에게 고의 또는 과실로 손해를 가한 경우 책임을 집니다.
2. 여행업자는 항공기, 기차, 선박 등 교통기관의 연발착 또는 교통체증 등으로 인하여 여행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여야 합니다. 단 여행업자가 고의 또는 과실이 없음을 입증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합니다.
3. 여행업자는 자기나 그 사용인이 여행자의 수화물 수령·인도·보관 등에 관하여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하였음을 증명하지 아니 하는한 여행자의 수화물 멸실, 훼손 또는 연착으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를 배상하여야 합니다.
제9조 (최저 행사인원 미 충족시 계약해제)
1. 여행업자는 최저행사인원이 충족되지 아니하여 여행계약을 해제하는 경우 당일여행의 경우 여행출발 24시간 이전까지, 1박2일 이상인 경우에는 여행출발 48시간 이전까지 여행자에게 통지하여야 합니다.
2. 여행업자가 여행참가자 수의 미달로 전항의 기일내 통지를 하지 아니하고 계약을 해제하는 경우 이미 지급받은 계약금 환급 외에 계약금 100% 상당액을 여행자에게 배상하여야 합니다.
제10조 (계약체결 거절)
여행업자는 여행자에게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여행자와의 계약체결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1. 다른 여행자에게 폐를 끼치거나 여행의 원활한 실시에 지장이 있다고 인정될 때
2. 질병 기타 사유로 여행이 어렵다고 인정될 때
3. 계약서에 명시한 최대행사인원이 초과되었을 때
제11조 (여행요금)
1. 기본요금에는 다음 각 호가 포함됩니다. 단, 희망여행은 당사자간 합의에 따릅니다.
- 항공기, 선박, 철도 등 이용운송기관의 운임(보통운임기준)
- 공항, 역, 부두와 호텔사이 등 송영버스요금
- 숙박요금 및 식사요금
- 안내자경비
- 여행 중 필요한 각종 세금
- 국내 공항·항만 이용료
- 일정표내 관광지 입장료
- 기타 개별계약에 따른 비용
2. 여행자는 계약 체결시 계약금(여행요금 중 10%이하의 금액)을 여행업자에게 지급하여야 하며, 계약금은 여행요금 또는 손해배상액의 전부 또는 일부로 취급합니다.
3. 여행자는 제1항의 여행요금 중 계약금을 제외한 잔금을 여행출발 전일까지 여행업자에게 지급하여야 합니다.
4. 여행자는 제1항의 여행요금을 여행업자가 지정한 방법(지로구좌, 무통장 입금 등)으로 지급하여야 합니다.
5. 희망여행요금에 여행자 보험료가 포함되는 경우 여행업자는 보험회사명, 보상내용 등을 여행자에게 설명하여야 합니다.
제12조 (여행조건의 변경요건 및 요금 등의 정산)
1. 위 제1조 내지 제11조의 여행조건은 다음 각 호의 1의 경우에 한하여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여행자의 안전과 보호를 위하여 여행자의 요청 또는 현지사정에 의하여 부득이하다고 쌍방이 합의한 경우
- 천재지변, 전란, 정부의 명령, 운송·숙박기관 등의 파업·휴업 등으로 여행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
2. 제1항의 여행조건 변경으로 인하여 제11조제1항의 여행요금에 증감이 생기는 경우에는 여행출발 전 변경 분은 여행출발 이전에, 여행 중 변경분은 여행종료 후 10일 이내에 각각 정산(환급)하여야 합니다.
3. 제1항의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고 여행조건이 변경되거나 제13조 또는 제14조의 규정에 의한 계약의 해제·해지로 인하여 손해배상액이 발생한 경우에는 여행출발 전 발생 분은 여행출발이전에, 여행 중 발생 분은 여행 종료 후 10일 이내에 각각 정산(환급)하여야 합니다.
4. 여행자는 여행출발후 자기의 사정으로 숙박, 식사, 관광 등 여행요금에 포함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 경우 여행업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요금의 환급을 청구할 수 없습니다. 단, 여행이 중도에 종료된 경우에는 제14조에 준하여 처리합니다.
제13조 (여행출발 전 계약해제)
1. 여행업자 또는 여행자는 여행출발전 이 여행계약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발생하는 손해액은 '소비자피해보상규정'(재정경제부고시)에 따라 배상합니다.
2. 여행업자 또는 여행자는 여행출발 전에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 상대방에게 제1항의 손해배상액을 지급하지 아니하고 이 여행계약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 여행업자가 해제할 수 있는 경우
· 제12조제1항제1호 및 제2호사유의 경우
· 여행자가 다른 여행자에게 폐를 끼치거나 여행의 원활한 실시에 현저한 지장이 있다고 인정될 때
· 질병 등 여행자의 신체에 이상이 발생하여 여행에의 참가가 불가능한 경우
· 여행자가 계약서에 기재된 기일까지 여행요금을 지급하지 아니하는 경우
- 여행자가 해제할 수 있는 경우
· 제12조제1항제1호 및 제2호사유의 경우
· 여행자의 3촌이내 친족이 사망한 경우
· 질병 등 여행자의 신체에 이상이 발생하여 여행에의 참가가 불가능한 경우
· 배우자 또는 직계존비속이 신체이상으로 3일 이상 병원(의원)에 입원하여 여행 출발시까지 퇴원이 곤란한 경우 그 배우자 또는 보호자 1인
· 여행업자의 귀책사유로 계약서에 기재된 여행일정대로의 여행실시가 불가능해진 경우
제14조 (여행출발 후 계약해지)
1. 여행업자 또는 여행자는 여행출발 후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경우 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습니다. 단, 이로 인하여 상대방이 입은 손해를 배상하여야 합니다.
2.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계약이 해지된 경우 여행업자는 여행자가 귀가하는데 필요한 사항을 협조하여야 하며, 이에 필요한 비용으로서 여행업자의 귀책사유에 의하지 아니한 것은 여행자가 부담합니다.
제15조 (여행의 시작과 종료)
여행의 시작은 출발하는 시점부터 시작하며 여행일정이 종료하여 최종목적지에 도착함과 동시에 종료합니다. 다만, 계약 및 일정을 변경할 때에는 예외로 합니다.
제16조 (설명의무)
여행업자는 이 약관에 정하여져 있는 중요한 내용 및 그 변경사항을 여행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여야 합니다.
제17조 (보험가입 등)
여행업자는 여행과 관련하여 여행자에게 손해가 발생 한 경우 여행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한 보험 또는 공제에 가입하거나 영업 보증금을 예치하여야 합니다.
제18조 (기타사항)
1. 이 계약에 명시되지 아니한 사항 또는 이 계약의 해석에 관하여 다툼이 있는 경우에는 여행업자와 여행자가 합의하여 결정하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경우에는 관계법령 및 일반관례에 따릅니다.
2. 특수지역에의 여행으로서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약관의 내용과 다르게 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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